[ 평창초교 100주년에 만나는 가산 이효석 선배님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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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2-06 01:44 조회5,683회 댓글2건본문
이 글에 의한 어느 선배님의 발기로, 발기 당시 설명은 조각과 문학이란 어려움은 있은듯 하지만 모든 선, 후배님들이 공감하시고 가산 선배님의 동상이 제막된 것이다.
이렇듯 인터넷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중요한 소통의 매체로서 펜의 힘은 총구의 총알의 방향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앞으로 다가오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정선아리랑이 아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평창아라리의 그대로 올림픽 개회식에 한마당 공연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함께 참여하여 기원하면 꿈은 이루러질것이란 기대에 앞으로 평창아리랑의 공연기원에 관한 글을 써서 게제하겠습니다.
평창아라리는 가락의 유희를 넘어서는 이땅의 선인들과 우리들의 삶의 얼굴이고 표정인 것입니다.
평창아라리와 정선 아라리의 관계의 글은 다음으로 게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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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초교 100주년에 만나는 가산 이효석 선배님은?? ]
후 세 백 작 2010.10.17 04:34
저는 평창초교 55회 졸업생으로 금번 평창초교 총 동문회의 결성을 환영하며 그동안 저의 생각의 글을 씁니다.
총 동문회의 결성은 평창초교 총 동문들의 한마음 화합의 잔치. 이는 저의 마음속 한 부분엔 애타게 기다리던 설레임이었습니다.
앞으로 2년후엔 모교의 100주년이며 그리고 4년후엔 100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시간입니다.
역사에서 100회란 수치는 짧은 듯하지만 우리의 근대사에서 100년 역사의 학문의 전당이란 참으로 높은 금자탑의 실현인 것 입니다.
평창초교는 1912년에 개교하여 앞으로 2년 후 2012년에 개교 100주년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제 우리는 평창초교 동문들의 화합과 전진을 위해 모두 모교에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2년 후로 개교 100주년이란 평창초교가 학문의 전당으로 지역사회를 개척하는데 이 얼마나 장엄한 학문의 금자탑을 쌓았습니까?? 무릇, 얼마나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우리 지역고장의 발전과 각 개인의 영달에 얼마나 많이 이바지하였습니까??
동문 선배님, 후배 모두 모이는 한마당의 자리에서, 앞으로의 역사에 길이 새겨질 모교에 기념 모뉴먼트를 하나 건립하고자 한다면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교를 빛낸, 그리고 우리의 희망을 밝혀주는 가장 걸출한 선배님으로는 누구나 다 잘 알고계실 가산 이효석 선배님의 동상제막이 좋치안을까 생각합니다.
이효석 선배님은 1907년 평창군 진부 장전리 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봉평으로 이사하여 2년만에 1914년 평창 보통공립학교를 입학하셨고 1920년에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를 수석입학, 25년에 수석 졸업( 당시는 중, 고등학교가 통합 5년제로 경성제일고보는 현 경기고의 전신). 또 경성제대(현 서울대) 수석입학 및 수석졸업의 영예와 이후 지금까지의 한국 문단에서 순수문학으로 단연 우뚝 솟은 단편의 문학작가로 그는 평창초교가 낳은 최고의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의 자세한 연표는 인터넷에도 없는데 아래의 참조글은 일전 9월29일자 강원도민신문에 게재된 총 동문회 부회장님의 이효석 선배님에 관한 글 중 일부입니다.
선생님은 1907년 2월 23일 생이시며 1914년 3월 25일 보통공립학교 6회로 졸업하셨고 졸업 대장번호는 97번으로 지금도 평창초등학교에 대장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 1914년에 8세때 초교 졸업은 오류인듯하고 입학연도가 1914년도이며, 졸업년도는 1920년 입니다. 그리고 1912년개교 하였으면 1914년 입학자들은 3회 졸업생이라야 수치가 맞을 텐데 위의 글대로 6회 졸업생이라면 1912년 개교 당시는 6회까지는 6개월에 한 학년 수료인 듯합니다)
일전 이효석 님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평창의 지식인들이 모교인 우리 평창초교에 그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좌절되었습니다. 이는 봉평의 효석문학 기념사업회 주관의 문인들의 효석 문학관에서의 쎄미나에서 그들만 모여서 어느 연사가 가산 선생님이 경성제대 졸업 후 스승의 천거로 취직하고 일본어로 " 녹색탑"이라는 소설을 써서 일제 강점기에 내선동조 했다는 이유로 동상 건립을 파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럼 봉평은 가산 문학을 태두로 한 메밀축제를 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선동조하였다고 스스로 우기는 봉평 일부 문인인들이 떠드는데 가산선생님을 팔아 먹고산다면, 이는 아무리 먹고살기 급하다 하여도 양심의 이율배반인듯합니다. 하지만 이의 문제는 봉평의 일부 문인들의 속없는 짧은 생각이라 단정하고 싶다.
그 소설에 내선동조란 표현을 쓴다면 가산선생님의 아버님은 일제때 진부면장을 지내셨으며, 그리고 당신의 조상님들도 일제 강점기때 무엇을 했는가 곰곰히 곱십ㅅ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당시 초교 1학년부터 한글이 아닌 일본어 교과서 위주의 공부를 하였슬 터인데,,그럼 당시 (1930년대 전후) 문인들의 한글 소설은 얼마나 위대한 애국자임도,
가산 선생님의 작품도 당시에 모두들 출간된 것이 아니라 가산 선생님의 장녀가 해방이후 선, 후배들을 찾아 가산의 원고를 모아 출간된것으로 미루어 작가들도 얼마나 힘들었슬 듯한 시기였슴에 틀림이 없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글은 저의 블로그 " 후세백작의 지평"에 카테고리 " 평창의해부"와" 봉평인들은 가산 선생을 어찌하려는가?" 등 다수의 글로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매국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저의 " 3,1운동"의 글도 참조 바랍니다)
또한 효석 문학의 밤은 평창에서 개최 되었는데 언젠가는 고 "박동락"씨의 편에 실려 봉평으로 이사간 듯 합니다. 그분이 평창중,고 동창회장을 하였는데 평창에 저해하는 일을 했다면 그는 정통파가 아니란 저의 불만도 토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봉평은 메밀꽃에 가산 선생님의 문학을 얹어 지난해에는 매출 150억이 넘었다는데 위의 이야기를 보면 기실 가산 선생님은 봉평이 출생지도 아니고 초교 입학전에 2년간 정도 살았던 것입니다.
80년 당시 장평의 가산 선생님의 묘도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로 이장공고로 누구하나 무관심속에 고향 앞으로 가기 위해 파주 공원묘원으로 이전할때 그를 지원해줄 예산과 모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영월에선 영월 문화원장님의 노고로 김싯갓 묘가 학계에 인정받으며 이젠 영월의 최대의 관광 자원으로 김삿갓면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평창은 최소한 가산 선생님의 문학의 메카가 되었어야 할텐데 이러한 일들은 우리 후배들은 가산 이효석님이 우리의 모교 대선배인줄도 모르는 무관심의 탓인 것 입니다.
그럼 관심이란 무엇인가하면?? 이는 나의 주변을 돈독히 설정하여 나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효석 님에게 관심을 가지려면 가산 선생님의 일대기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봉평문학 세미나에서 문제가 된 그의 일본어 소설 "녹색탑"으로 인하여 그는 카프 그룹에서 동반작가로 비유하는 선배 유진오(고대 총장역임)과 유치진등의 신랄한 충고로 인하여 그의 직장을 사표쓰고 그의 처가인 경흥에서 임시교편을 잡다가 평양의 숭실대( 대동공업대)에서 교수역임으로 안정적 생활속에 주옥같은 " 메밀꽃 필무렵"이 탄생된 것이다.
이 "메밀꽃 필무렵'의 소설은 그의 사상의 평온기와 절정기의 배경의 시간속에 가장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쓰여진 것입니다.
그 소설의 원천적 배경의 힘엔 그가 일곱살에 평창초교를 입학하고 봉평의 가족과 떨어져 평창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고, 아마 일요일에 간혹, 또는 방학이 되면 역마차나 걸어서 봉평 집으로 가며, 때론 달밤에 창동리 집에 당도하였슬 것이다.
이때 달밤에 비치는 봉평 어귀의 산야에 척박한 땅에 자라는 메밀꽃 풍광을 그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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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을 지난 무렵인지,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 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온통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의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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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귀는 그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속에 이야기로 아마 평창에서 봉평 집으로 100여리 산길과 개울을 건너 걸어야 했고, 늦은 밤에 집에 당도하는 평창초교 시절의 추억과 경험이 그의 문학관에 향토적이고 낭만적인 서정성을 나타 내었다 생각해 본다..
그의 소설 " 메밀꽃 필 무렵"에서 전반적인 테마의 기조는 장돌뱅이의 장으로의 이동인데 이는 초교시절 방학을 맞으면 평창읍에서 걸어 밤에 봉평 집으로 당도하며 달밤에 비취는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듯한 인상과 작가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문학이 이만한 서정성의 아름다움이 또 있슬런가??
대부분의 문학에 性의 아름다움을 표출하듯이 " 메밀꽃 필 무렵"에선 허생원의 애틋한 사랑으로 흥정천 개울건너에 물레방아를 은밀한 사랑의 장소로 만들었다. 이것이 작가 본인의 마음을 드러낸 한 단면일 것이다.
화려하게 만발하던 꽃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꽃의 아름다움도 없을 것이다. 늦 여름자락에 권부성이처럼 연약한 대공을 받침으로 피어나는 메밀꽃은 순백의 하얀 꽃들은 가난한 농부들의 순박한 마음을 알아 주는 듯한 느낌이다.
달밤에 산길을 걸으며 고백했던 허생원의 비밀스런 사랑의 이야기도, 달빛에 소금 뿌린듯한 분위기가 아니었으면 그런 고백이 가능하였슬까??
고단한 장돌뱅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달빛깔린 산길을 걸으며 소금 뿌린듯한 순백의 메밀꽃을 보며 허생원에겐 수십년 숨겨온 어느 해 여름의 물레방앗간에서의 사랑의 추억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묘한 분위기였으리라.
또한, 달빛에 소금뿌린듯한 메밀꽃은 늦 여름의 찌는 듯한 한낮의 더위엔 아랑곳이 없이 밤으론 벌써 가을이 온 듯한 느낌과 가을이 지면 겨울로 들어서는 이별의 휜눈이 덮인 산하를 연상하는 것이다. 지난 여름의 달콤한 사랑도 겨울은 먼 꿈속에서 그리워 하는 이별의 애틋한 기다림이 담겨 있을 듯 하다.
한마디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겠지만 가산 이효석 선생님의 문학관은 인간의 애욕과 자연, 도덕적 윤리의 모럴에 자연속에 인간의 문제를 심미적으로 다루는 원초적 본능의 사랑을 향토적, 서민적 삶 속에서 표출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서양엔 "채털이 부인의 사랑"이란 작품이 성의 한계의 영역을 높이는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을 표현 했다면, 이효석의 " 메밀꽃 필 무렵"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속에 性과 사랑이 소박하고 애틋한 그리움의 인간미를 대상으로 탐구 하였던 것이다.
누가 이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수 있는가??
위 사진은 봉평 가산 공원내의 가산 선생님의 흉상이다.(사진을 더 꾸겨 넣지도 못하는 프레임입니다)
나의 감상으로는 가산선생의 생활은 이런 모더니즘의 각과 고딕양식을 좋아 하였었지만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의 배경엔 부자보다는 가난한 농부가 뒷 동산 척박한 땅에 화전을 하여 메밀을 꽃이 아니라 생계유지의 식량으로 ,,,
그 속에 허생원의 물레방아의 추억과...이런 오브제와는 동떨어진 현대식의 공원같은 느낌이다.
도시사람들이 도시에도 공원은 많은데 그와 동일한 감의 공원을 보고자 이곳까지 올줄이야...
가산 공원내에 그의 싯귀같은 서정적 표현의 비문이다.
왼쪽의 수직이 마음에 전혀 들지않지만 그를 이해하고 감상하여 본다면 그런데로 자연적이고 순수한,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단순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화강암의 조각이라 돌의 성격과 무게를 이해하는 데포름( 변형)도 자연스럽지만이 조각은 김의웅 조각가의 씨리즈 창작 조형물로 그분의 조각의 알림같은 즉, 가산공원내에 가산선생님의 이미지를 혼돈하는 결과를 자처하는 기분이다.
-------------- 終 ------
이번 평창초교 총 동문회를 한다는데,,,,
이 고장 역사에 길이 빛나는 학문의 전당 평창 초등학교. 이제 100년의 역사를 맞이할 시간이 도래합니다.
아마 100년역사의 초교에 가장 걸출한 인재는 가산선생님 아닙니까?
평창에 초교 1학년부터 하숙하며 방학이라야 걸어서 봉평에 도착할 밤중에 달빛에 비치는 소금 뿌리는 듯 한 메밀꽃의 명문장은 그때의 회상인 듯 하지요.
이번에 우리 동문의 힘으로 모교에 가산 이효석 선배님의 동상을 건립함이 좋치 않을까요??
이는 100년 역사의 한 정표의 기념비로 상징성을 갖추어야 할텐데....누가 그리 이해나 할지 모르겠네요,
혹 정치인이나 경제인의 선배님들이 계시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한 싯점의 일이지만 가산 이효석 선배님은 우리 대한민국이 지속하는 한 언제나 그 이름을 지울 수 없는 시대를 넘어서는 지성으로 국문학사에 영원히 우뚝 서 있습니다.
평창초교의 모든 동문님들은 이 가산 선배님의 높은 업적을 기리는 정표를 마련함도 좋으리란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도 선배 위인이 계시는 것은 평창초교 100년 역사의 자랑이고, 후학들에게는 희망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현명하신 선, 후배 동문 여러분님의 중지를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창초교 55회 高 柱 浩 拜上
댓글목록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사진은 내가 원하는 위치에 가지도 못하고 단 두장만 제한되는...
웃겨요.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윗 글에 빨간부분의 글이 이해가 좀 않될듯하여 자세히 기술한다.
언 선배가 모 신문에 이효석이 2007년에 출생연대와 초교 졸업년도가 2014년이라면 여덟살에 초교를 졸업했다는,,
상식선에도 맞지 않는데.. 나는 오류라 지적하여 쓰는데,,,
""1912년개교 하였으면 1914년 입학자들은 3회 졸업생이라야 수치가 맞을 텐데 위의 글대로 6회 졸업생이라면
1912년 개교 당시는 6회까지는 6개월에 한 학년 수료인 듯합니다"" 라고 나는 표시하고 있다.
또한 2012년에 개교 100주년이고 2014년에 100회 졸업생이 배출된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힘든 추정치이지만
신문에도 오류인듯 합니다만,,,
1912년에 개교하가고 6년 졸업생은 201팔년 2월쯤 졸업한다. 그러면 2014년 입학이면 2020년 3회 졸업생이 되어야 하는데
6회 졸업생이라면 6회이전에 3번은 1년에 두번씩 신입생을 모집하여 일년에 2회씩 졸업하게 된다.
이런게 우리 일반상식을 넘기에 이 글을 보신 너브산장님은 평창초교에 가서 졸업대장을 확인까지 하고서는
나의 글이 맞다고 한다.
너브산장님은 정확성을 가지고 계신듯하다.
그보다 너브산장님은 역사의 정확성을 가리기위해 졸업대장까지 확인한 것이죠.
참고로 평창초교의 처음 위치는 중리 제일 감리교회 자리이고 아마 교회랑 같이 병설된듯 하며 이효석이 중리에서 하숙하기
이전에 저 학년시절엔 교회부설 기숙사같은 곳에서 생활한듯 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평창감리교의 병설 유치원 정경희 선생님 (현 94살)이 더욱 정확히 알고 잇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나의 블로그의 2~300만자 근처정도일 나의 모든글에 가능하면 역으로 모순이 없는 글을 쓰고자 노력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