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 적석총이라는 역사에 관하여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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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7-04-30 23:21 조회5,056회 댓글1건본문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 적석총이라는 역사에 관하여 문제제기]
후세백작 2017.04.28 00:47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의 두 곳은 평창의 고대유적으로 사료가 충분치 못한점과 비 인기 역사로 취급당하며 이해의 부족으로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 두 점에 관하여 사가들의 기존의 학설에 反하는문제를 제기한다.
아래에 인용한 "강원도의 선사문화"의 문헌의 여만리 강가의 "예담"과 응암리의"이담'이라는 유적을 적석총으로 서술함에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또한 이 유적을 다른 각도로 이해해 본다.
여기서 본인은 이 글이 어떠한 사료적 학술논문이 아니고, 역사에 소통의 장으로 일반인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노력하겠다.
---------< 인용부 >---------------------------------------------------------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 평창편 발췌 인용
▲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72
응암리 적석총과 출토된 가야식 토기 사진.
◆소재지 ; 여만리. 명칭-적석총. 초가철기시대
조사내용- 현지에서는 "일담" 또는 예담'이라 불리웠는데 평창강의 제방을 쌓는데 이용되어 현재는 사라졌다.
-이상-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18-5
◆소재지- 평창읍 응암리 5. 명칭-적석총, 초기철기시대
현재 주변은 밭으로 응암리 4번지이나 적석총만큼은 응암리 5번지로 군유지 임야(304평)으로 되어있다. 여만리 적석총은 "예담" 또는 "일담이라 하지만 이곳은"이담'이라 불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40m× 20m의 크기로 높이 1m정도로 테두리는 큰 자갈을 이용하고 안쪽으로는 잔 자갈을 채우고 한 가운데는 잔 자갈로 만든 석곽이 있었다 한다. 마지리의 제방을 쌓기위해 이 돌을 옮겨가고 현재는 파괴되었다.
돌을 실어나르는 과정에서 큰 칼과 김해식 토기 3점이 출토되었다 -이상-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강원도의 선사문화>란 도감 책자엔 위의 사진과 단순한 설명 더 이상도 없고 응암의 적석총은 평창문화원이 2016년에 발행한<지명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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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상고사의 유적과 의의>
이 두 곳의 역사를 고찰해보기에 앞서 우선 평창의 상고사인 선사시대로 부터 전해지는 개괄적 역사를 들춰본다.
강원도의 선사유적은 춘성군, 명주군, 양구군과 평창이 가장 많이 발견되며 평창 인근의 정선이나 영월은 같은 공간성의 영서의 환경이지만 정선은 북면에서 3-4점의 선사유적과 영월도 선사유적의 채집은 그리 많치 않은 편이다.
그러나, 평창의 역사는 태백산맥이라는 천혜의 자연여건으로 영동과는 갈라졌으며 이로서 문화의 차이도 발생되는데, 서쪽으로 확장에는 산이 가로막고 물을 건너는 교통 여건때문에 문화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 곳이다.
하지만 평창은 산골짜기를 따라 구불거리며 흐르는 평창강이 퇴적 평야를 만들고 또한 물의 사용이 용이하여 주거의 입지조건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주위를 둘러싼 산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자연적 요새지를 만들어 주었기에 평창읍내 평창강 유역의 전지역 (임하리. 계장리. 주진리. 후평리, 상리, 종부리, 유동리, 천동리. 응암리등)에서 선사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여기서 평창과 정선의 선사유적 차이는 선사인들의 수렵과 농경문화의 병행에서는 가리왕산, 청옥산을 위시하여 어느곳에서든 산나물을 채취하여 춘궁기에 식량으로 대신하지만 정선은 산나물이 그리 많지도 않다. 그러기에 정선아리랑의 산나물이나, 산의 정서가 담긴 아라리는 모두 그 시원이 평창아라리인 것이다.
이렇게 평창은 산나물이 지천에 있다는 것은 토질도 좋아 농사에도 적합한 환경이란 뜻을 내포하기에 선사인들이 정착하기에 용이한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지는 것이란 점이다..이것이 영서의 인접지방과 평창의 차별성이고 도돈을 돌아굽는 평창강 구릉지는 마치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지형처럼 착각할 정도로 동일한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어서 평창은 태고이후 선사인들이 정착생활에도 용이한 기후와 토양, 강의 상류의 식수와 수렵등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는 곳이다.
이러한 평창의 고대 역사유물에 80년대 고교 역사선생님들의 노력에 의하여 주진강등에서 다양한 석기유물을 발견하여 현 평창중학교에 보관되어 있으며, 또한 시루목 중개소 아래 친구네 참외밭 한 가운데 자리잡은 신라 초기형 화랑이 없는 석실이나 임하리, 상리, 종부리등에 3m이상의 고인돌, 천동리의 농경지에 석기인의 주거지등 유독 평창강 유역은 어디에서든 예로부터 고대인들이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난해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지에서 비파형 청동검과 동시에 고인골(古 人骨)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2,500년전의 인골로 추정되며 어느 지역에서도 출토가 되지않은 고 인골로 이의 DNA 검사나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 대륙의 이동 역사에서 우리 선조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임과 부수적으로 평창의 기후, 자연환경등이 밝혀져 평창은 대한민국의 표준 생활환경임을 자랑할 수 있슬 것이다.
그러나 인근 주변의 지자체에서는 모두가 만드는 박물관 하나가 없어서 이러한 평창의 선조인들의 천년이 넘은 유물들이 전셋방을 긍긍하며 고 인골은 고인골 학자의 창고에 갖히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평창의 비극의 한 점이다.평창의 정체성과 우리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천년전의 상고사까지 전부 복원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현존 가능한대로의 깨지면 깨진 그대로의 유물을 사랑할 줄 아는 시민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중요성이란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에 의한 평창의 정체성과 칼라의 사상과 이테올르기로 미래를 예약할 수 있고 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는 중요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태백산맥을 있는 역사의 흐름에 영서지방의 평창은 대표적 주자로 역사의 시대를 연결하는 어쩜 빛나는 면류관의 주인이란 점이다.
이에 본인은 많은 지식을 습득한 역사가는 아니지만 우리 세인들의 상식으로 평창인 모두가 의식하고 공유하자는 의미에서 평창에 박물관 건립의 취지등에 관한 다수의 글을 쓴것처럼 이제 평창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박물관 건립으로 흩어져버린 평창의 모든 역사 사료들,,, 현지에 있어야 할 고인돌까지도 관리할 수 있는 향토사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로써 평창의 역사속에 담겨있는 문화를 자랑으로 삼아 의식과 긍지를 높여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평창인들의 자세를 다시한번 점검해본다면 영월과 정선은 엉터리 역사를 포장하여 전국의 답사 일번지를 만들었다.당시 평창의 케치프레이즈는 해피 700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추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바처럼 평창은 산과 강을 굽도는 곳의 퇴적평야들에 선사인도 생활하기 종은 택지를 마련하기에, 또한 해피 700의 따사로운 햇살이 감도는 청정 하늘도 가세하는 것이다.
여기서, 700고지가 신체 리듬에 쾌적할 할 수는 있어도 장수한다는 이야기는 위선이다 세계의 장수촌은 해발 150m이내이며 높은 고도에서도 장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런 설명은 적확하지 못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당시에도 나의 친구들은 계장 또래라.. 당신들은 군대로 말하면 말뚝하사관들이니 당신 집을 수선함에는 합당한 것으로 하라고 말한적이 있다.
그러면 해피 700에관해서 인간 수명과 쾌적한 기분등 생리적인 것만 집착하기엔 너무 고지식하였다, 시각을 넓혀서 해피 700의 청정 하늘에 요즘 레져의 첫번째 산업은 천문대이다. 고도의 위치에 맑은 하늘엔 별빛도 초롱하기에 천문대도최적지란 점으로 만약 평창에 천문대가 잇다면 영월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내방할 것이다.
물론 영월에 있지만 밤하늘 보는 초교생들에겐 그 수요가 모자라고 또한 영월의 천문대보다 평창의 청정하늘에 천문대는 그만큼 더 효과적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끝나고 평창의 콘도등에 손님을 부르는 여러 방법중 그 첫째가 천문대일것이다. 이렇게 해피 700도 생체적을 넘어서는 레져의 시각에서 바라봤어야 했다. 아니 지금도 늦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이렇게 평창은 동계 스포츠에서부터 밤하늘의 천문데까지 총체적 레져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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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 적석총이라는 역사의 오류에 문제풀이]
위의 역사서 <강원도의 선사문화>라는 도록에서는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라 불리는 돌무지를 모두 적석총(積石塚)이라 한다, 또한 평창문화원 발간의 지명지에서 여만이의 예담은 기록조차 없지만 응암리의 이담은 상세 설명하며 전투를 위해 돌을 모았다는등 여러가지 설 중에 적석총을 제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전투를 위해 돌을 모았다는 것은 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나 행주산성에서는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다 모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래서 행주산성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도원수 권율목사가 인근 부자들에게 도면을 주고 석차등을 만들어 줄것을 부탁하였던 바 해주 부자들이 제일많이 만들어 노비들이 등에 메고 짋어지고 행주산성으로 날리올때 부녀자들은 앞 치마인 행주치마에 담아서 일렬로 이동하는 모습에 행주라는 단어가 더 인상적이지 않켔냐는 박사논문이 더 확증적이다
만약, 문경새재에서 조정으로 올라오는 적들에세 전투를 대비하여 돌을 모아두었다면 이해하겠으나 강가에 누적단 두 곳에 돌을 모아 전투를 대비한다는데, 그럼 적은 사방 팔방으로 흩어져 지나간다면,,, 옛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어둡지는 않습니다.
다만 학자들의 이론에 구조적으로 뻐져드는 마치 매너리즘적 논리성이 현실을 무시했기에 이런 경우를 설명하는듯 합니다.
그러기에 응암리이나 여만리의 천변의 장강에 흔한 돌을 굳이 모아서 전투 대비를 할 필요가 상식에 위배된다.
또한 역사에서 모두 적석총이라 하지만 이 두 곳의 돌무지들은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대 신앙의 성립과 제반 이야기>
적석총의 고구려의 무덤양식입니다. 적석총은 고구려에서 시발되어 백제문화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백제초기 적석총은 송파의 삼전지하차도 위에 있다.
이 적석총은 초기 적석총으로 별로 크지 않은 돌로 3단을 쌓았는데 그리 높지않고 4각스퀘어 모양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 2km에 백제 초기 고분군이 있는데 그것의 양식은 신라 무덤군처럼 둥그렇게 쌓은 흙의 분묘로 이 고분들은 삼전동 적석총에서 멀지 않은 시간대에 이질적 문화양상을 드러낸다.
4각 묘에 대해서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지만 본인은 지구상의 4각 묘들은..,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 태왕비나 장군총,마야, 아즈택 문명의 신전이나 이집트 기자 피라밋, 그리고 서안의 미 발표분 피라밋 수백개...왜 이 묘들은 자연스럽게 둥근 모양이 아니고 4각 뿔의 피라밋 형태를 추구하는가 하는 점의 공통점에 상당한 의문을 가진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과 원형, 그리고 지역적 여건에 따르는 자연형등 몇개 않되는 도형에 4각형을 취하는 것은 어쩜 보편적 견해일지 모르나 미술과 문화의 특성중의 하나는 비쥬얼 싸인의 시각적 언어어이지만 이를 기억적으로 소화하여 일련의 시리즈 형태로 발전해 나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면, 인간의 발전역사는 이러한 계통적 추구에 의한것으로 이어져 오고있기 때문에 이 모든것이 하나의 문화권에서 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고구려 문화의 정체성에는 종묘, 사직과 더불어 동남방의 별자리로 보는 영성신앙(靈星)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엔 영성문화가 없는 중국것이라 하지만 고구려 문화엔 영성신앙의 영성제도 우리 문화의 저변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 연구총서 2005 p48 )
사직의 社와 稷 의 神은 물론 영성제는 일종의 농경의례로 농사의 전 과정을 모의 반복하는 의례로 어떤일을 흉내내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에 기초하여어떤 일을 흉내내는 주술로 가령 가뭄에 주술로서 마른땅에 물을 뿌리면 실제로 비가 내린다는 "모방주술"로 지금도 우리네 마음속에서도 이러한 동일한 생각까지의 저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고대국가에서는 종묘와 사직, 영성(靈星)숭배 사상은 어쩜 당연한 믿음이지만 이것은 대략 土神들이며 또한 여기에 이 모든 우주의 근간인 하늘의 神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북방 샤마니즘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로 우리나라에서는 잊혀져 가는 문화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을 보이게하는 깃발이기도 하며, 우리 마음의 평화의 염원을 펄럭이는 깃발에 실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중요한 영적 도구이다.
성황당(서낭당)의 서낭신은 민간신앙이라고 하는, 기복신앙(祈福信仰- ‘비는’ 문화)의 중심에서 오랜 세월 모셔져 온 것 같다.
서낭당은 성황당(城隍堂)과 같은 뜻이며 지역에 따라 천왕당이나 국사당등으로 불리는데,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콘모양의 돌무더기를 쌓은 누석단(累石壇)과 신성시되는 신수(神樹) 또는 장승으로 이루어 지는데 오색헝겊을 걸어놓은 서낭나무와 누석단으로 구성된다. 또한 서낭당은 당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누석단과 신수를 말하는 것이며 당집과 입석(立石)의 형태로도 구성된다.
마을에 하나씩은 서 있던, 당산(堂山)나무와 서낭당..오색 천을 걸어 바라에 날리던 모습, 마치 요즘 TV에서 보는 티벳 어느 산간마을처럼,,,서낭당의 서낭신앙은 마을수호라는 기능으로 서낭당은 지역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전쟁시 석전(石戰)에 대비하여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실제적인 기능보다는 마을수호,액운퇴치,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종교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호신으로서의 성황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성황은 국행(國行)성황과 민간에서의 성황으로 나누어 지는데 국행성황에는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옛 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마을 어귀에 서낭당에서 마을 수호와 전염병 예방의 기원등 祭儀의 고사를 지내고 빌며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의 문화는 우리 생활속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70년대 새마을 운동에 구 시대 유물로 사라진듯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엔 아직도 그에 대한 믿음의 신앙은 남아있다.
(의료 과학이 발달되기전 옛날엔 전염병은 중국이나 노르망디 에서 페스트란 전염병으로 수천만명씩 죽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나라엔 구한말 콜레라등이 끊이질 않았다 한다)
먼 길을 걸어갈때, 아니면 강가의 놀이에서도 돌을 쌓아놓고 무엇이든 잘 되라고 바라는 마음과, 그보다 좀 더 이해하자면 뒷뜰 장독대에 새벽에 기른 정화수를 올려놓고 두손모아 빌며 기원하는 마음은 기복신앙으로 서낭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네 사회는 오색천의 깃발과 누적단에 당집의 서낭당은 꺼려하면서도 진정 마음 한 구석엔 인간사의 심정을 하늘에 맞기는 신앙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여만리 예담의 소고>
평창의 여만리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으로막힌 퇴적지의 평야로 내왕의 입구는 꼭 강을 건너야 한다. 장마로 강물이 불땐 송개산 중턱을 타고 상리로 나올수도 있다. 본인은 이 길을 초교때부터 알고있었다. 그것은 장맛비가 오전내내 계속내리자 여만리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 가란다. 이미 배는 묶이고 늦기전에 송기산을 타고 집에가는 힘든 하교이지만 취미도 없는 과목을 수업하던 시간에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인은 여만리와 응암리를 자세히 쓸 수 있는것은 지금은 없지만 여만리엔 제일 친한 친구 두명이 살았고 응암리엔 지난 시절 천렵을 수 없이 다녀 동네에 또래의 남,녀는 모두 친구가 될 정도로 이 두곳은 논길까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 글을 쓰기에 참으로 다행이란 느낌마져 든다.
여만리를 들어가는 입구는 근자에는 교량이 있고 이전에는 배와 겨울철엔 섶다리로 왕래하였지만 그 옛날엔 자급자족 시대에 왕래가 그렇게 빈번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여만리를 통행하자면 시루목 개천의 징검다리가 가장 먼저이고 다음으로 여울 바로 위가 강물을 건너기에 가장 수월한 곳이다.
바로 이곳을 건너면 돌장광을 지나 밭터 사이에 약 1층반정도 높이의 돌 무더기가 그보다 좀 적은 무더기와 나란히 있었다(현 여만교를 건너서 오른쪽 여울 직전쯤) 역사에선 이를 적석총이라 하는데 총(塚)자는 무덤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설령 옛 조상들은 냇가에다 무덤을 쓸 일이야...아마 조상이 본새 청개구리였던 모양일까??
이 예담을 혹자들은 뙈담이라고도 하며 몽고군 항쟁정도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방어막 정도로 추정하던데,,,,뙈담은 아마도 예담의 강조되는 발음차이 정도일 것이고 위에서 설명대로 냇가에 石戰을 준비하는...몽고군 항쟁에 이런 돌 무더기를 쌓아서 뭘할까 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여만리 강을 건너서 들어서는 입구에 위의 설명대로 돌무더기 두개의 서낭단의 누적단이 쌓여 있다. 그 규모는 큰 누적단은 현 제방 높이쯤으로 전국 어디에도 이리 큰 누적단은 없슬듯 하다.
이 돌들은 강 부변의 큰 호박돌로 모두들 산화철 성분이 흘러나오고 씻기지 않아 검게되에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중요한것은 주진쪽의 위의 무더기가 더 높았으며 이러한 구(丘)을 만듬에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모구(旄丘)라 하는데, 이러한 서낭당이 정형이며 이로서 태백산의 민족정기를 잇는 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4자성어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뜻은 여우가 구릉을 향해 머리를 향한다는 의미이지만 어쩜 언덕을 향하는 바램은 인간의 이상인듯, 과거 고구려에서부터 우리의 역사에 임금도 장수도 모두 깃발로 상징하지만 서낭당의 모구에 꼽히는 깃발은 인간이 높은 하늘을 향해 제를 드리는 것이다.
( 이 서낭당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규모고 또한 두개의 누적단으로 정형이란 점인데. 제방돌로 사용할때 이러한 역사의 의미는 모르고 그 전경사진이나 실측의 기록도 남지 않고 그 동네 친구들도 사진기가 귀한 시간대라 사진 한장 없다.
아마 조선시대에는 이 누적단 서낭단 위에 적색과 백색 아니면 오색의 깃발이 나부끼었슬 것이다. 이것으로 요즘 시각에선 무당의 굿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이 앞을 지나갈땐 큰 소리도 잡담도 금했슬만큼 신성한 장소로 마을의 상징적 존재였다.
지금으로선 어디 어디 서낭당이 대표적이라 하지만 예전엔 여만리 서낭당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뿔모양의 돌무더기 두개는 적석총이 아니라 서낭당이다.
돌 누적단이 서낭당이란 입증적 요소를 하나 더 첨부하면 그 옆엔 당집이 있었는데 1972년도인가 종부다리도 내려앉는 홍수에 서낭당의 당집은 유실되었고 새마을 운동시기라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여기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내던 아름다운 모습의 문화는 단절되고 돌 무더기의 서낭당도 그 역사이야기는 잃어버린 것이다.
혹시나 이 점에 관하여 내용을 알고 계신 분들은 수고스럽지만 멘트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이 문화도 잃어버린 평창의 위대한 역사이고 서낭당의 의미도 모르면서 겉으로 서구식과 종교에서 볼때 가치없는 무속으로 폄하하지만 기실 오늘도 우리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전통문화이기에 역사 문화위원님들은 이에 고증도 있어야 좋다는 생각입니다.
<응암리 이담에 대한 소고>
위 사진에서 응암리 적석총은 BC 200~AD라 표시하는데..
당시에는 산에다 묘를 쓰는 것이 아니라 평지에다 쓰곤 하였다(삼전동 적석총, 각 고분들,,), 하지만 응암리 이담이라 불리는 돌담식의 무더기는 적석총 형태를 끼고 있지만 한 시기에 이루어진것이 아닌듯 하며, 또한 이상한것은 적석총 특성상 평지에서 만들어야 하지만 여만리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은 모두 강가장자리 천변의 지역에 있는데 이들은 큰 장마가 지면 수몰지역이 된다.
이곳에 적석총이라는 무덤을 썼다면 고대인들은 마치 청개구리가 냇가에 어미묘를 쓰고 걱정하는 愚人(어리석은)들이었단 말인가?? 이건 史家들의 악질스런 모습일뿐,,,
응암리는 전체 가구가 대략 25가구이다. 한때 평창군 인구가 10만일때나 지금 4만일때나 응암지역의 인구수는 영향을 받지 않는듯 하며 그렇다고 더 많은 가구가 늘어날 공간도 없는 실정이라면 이 적석총의 주인은 어떤 촌장이었슬까??
이 돌 무더기를 헐어서 제방에 사용할때 각기 다른 층에서 토기등이 출토되었다는데, 그러면 주거 공간이었슬까?? 알 수없지만 또 하나의 추정으로 땅 속엔 고려장터가 있지 않았슬까??
하지만 우리역사에 어떤 이상한 사가들의 말이 고려장이다.
땅을 파고 그 속에 늙고 병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먹을 것을 조금 넣어 이후 굶어 죽는 고려장..우리 역사에 이런 쌍넘의 문화는 없었다. 만약 이런 문화가 있었다면 부모님을 공경하는 문화가 없었어야 할 것이고 그런 풍습이 전래되었슬 것이다.
정말 이것도 또한 사가들의 악질적인 모습일뿐이다. 아마도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어거지 사관의 영향이 아닐까 추정하며 모든 역사책에서 이 부분의 재고는 있어야 한다.
또한 응암리 적석총은 바로 아래가 장마만 지면 입수지역인데..청개구리 무덤을 본땄는가?? 산을 넘어 응암리에 도착하는 낮은 구릉지도 많은데 왜 강 가장자리에 있어야 할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만약 다른 용도라면 무엇이었슬까??
본인으로선 이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역사는 여기서 끝난것이 아니기에 지금으로선 혹시나 고증이 있으면 더한 아름다운 문화라 생각합니다.
이로서 잃어버린 평창의 문화와 유적 두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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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 2017.04.28 00:47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의 두 곳은 평창의 고대유적으로 사료가 충분치 못한점과 비 인기 역사로 취급당하며 이해의 부족으로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 두 점에 관하여 사가들의 기존의 학설에 反하는문제를 제기한다.
아래에 인용한 "강원도의 선사문화"의 문헌의 여만리 강가의 "예담"과 응암리의"이담'이라는 유적을 적석총으로 서술함에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또한 이 유적을 다른 각도로 이해해 본다.
여기서 본인은 이 글이 어떠한 사료적 학술논문이 아니고, 역사에 소통의 장으로 일반인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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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 평창편 발췌 인용
▲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72
응암리 적석총과 출토된 가야식 토기 사진.
◆소재지 ; 여만리. 명칭-적석총. 초가철기시대
조사내용- 현지에서는 "일담" 또는 예담'이라 불리웠는데 평창강의 제방을 쌓는데 이용되어 현재는 사라졌다.
-이상-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18-5
◆소재지- 평창읍 응암리 5. 명칭-적석총, 초기철기시대
현재 주변은 밭으로 응암리 4번지이나 적석총만큼은 응암리 5번지로 군유지 임야(304평)으로 되어있다. 여만리 적석총은 "예담" 또는 "일담이라 하지만 이곳은"이담'이라 불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40m× 20m의 크기로 높이 1m정도로 테두리는 큰 자갈을 이용하고 안쪽으로는 잔 자갈을 채우고 한 가운데는 잔 자갈로 만든 석곽이 있었다 한다. 마지리의 제방을 쌓기위해 이 돌을 옮겨가고 현재는 파괴되었다.
돌을 실어나르는 과정에서 큰 칼과 김해식 토기 3점이 출토되었다 -이상-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강원도의 선사문화>란 도감 책자엔 위의 사진과 단순한 설명 더 이상도 없고 응암의 적석총은 평창문화원이 2016년에 발행한<지명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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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상고사의 유적과 의의>
이 두 곳의 역사를 고찰해보기에 앞서 우선 평창의 상고사인 선사시대로 부터 전해지는 개괄적 역사를 들춰본다.
강원도의 선사유적은 춘성군, 명주군, 양구군과 평창이 가장 많이 발견되며 평창 인근의 정선이나 영월은 같은 공간성의 영서의 환경이지만 정선은 북면에서 3-4점의 선사유적과 영월도 선사유적의 채집은 그리 많치 않은 편이다.
그러나, 평창의 역사는 태백산맥이라는 천혜의 자연여건으로 영동과는 갈라졌으며 이로서 문화의 차이도 발생되는데, 서쪽으로 확장에는 산이 가로막고 물을 건너는 교통 여건때문에 문화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 곳이다.
하지만 평창은 산골짜기를 따라 구불거리며 흐르는 평창강이 퇴적 평야를 만들고 또한 물의 사용이 용이하여 주거의 입지조건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주위를 둘러싼 산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자연적 요새지를 만들어 주었기에 평창읍내 평창강 유역의 전지역 (임하리. 계장리. 주진리. 후평리, 상리, 종부리, 유동리, 천동리. 응암리등)에서 선사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여기서 평창과 정선의 선사유적 차이는 선사인들의 수렵과 농경문화의 병행에서는 가리왕산, 청옥산을 위시하여 어느곳에서든 산나물을 채취하여 춘궁기에 식량으로 대신하지만 정선은 산나물이 그리 많지도 않다. 그러기에 정선아리랑의 산나물이나, 산의 정서가 담긴 아라리는 모두 그 시원이 평창아라리인 것이다.
이렇게 평창은 산나물이 지천에 있다는 것은 토질도 좋아 농사에도 적합한 환경이란 뜻을 내포하기에 선사인들이 정착하기에 용이한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지는 것이란 점이다..이것이 영서의 인접지방과 평창의 차별성이고 도돈을 돌아굽는 평창강 구릉지는 마치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지형처럼 착각할 정도로 동일한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어서 평창은 태고이후 선사인들이 정착생활에도 용이한 기후와 토양, 강의 상류의 식수와 수렵등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는 곳이다.
이러한 평창의 고대 역사유물에 80년대 고교 역사선생님들의 노력에 의하여 주진강등에서 다양한 석기유물을 발견하여 현 평창중학교에 보관되어 있으며, 또한 시루목 중개소 아래 친구네 참외밭 한 가운데 자리잡은 신라 초기형 화랑이 없는 석실이나 임하리, 상리, 종부리등에 3m이상의 고인돌, 천동리의 농경지에 석기인의 주거지등 유독 평창강 유역은 어디에서든 예로부터 고대인들이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난해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지에서 비파형 청동검과 동시에 고인골(古 人骨)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2,500년전의 인골로 추정되며 어느 지역에서도 출토가 되지않은 고 인골로 이의 DNA 검사나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 대륙의 이동 역사에서 우리 선조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임과 부수적으로 평창의 기후, 자연환경등이 밝혀져 평창은 대한민국의 표준 생활환경임을 자랑할 수 있슬 것이다.
그러나 인근 주변의 지자체에서는 모두가 만드는 박물관 하나가 없어서 이러한 평창의 선조인들의 천년이 넘은 유물들이 전셋방을 긍긍하며 고 인골은 고인골 학자의 창고에 갖히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평창의 비극의 한 점이다.평창의 정체성과 우리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천년전의 상고사까지 전부 복원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현존 가능한대로의 깨지면 깨진 그대로의 유물을 사랑할 줄 아는 시민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중요성이란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에 의한 평창의 정체성과 칼라의 사상과 이테올르기로 미래를 예약할 수 있고 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는 중요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태백산맥을 있는 역사의 흐름에 영서지방의 평창은 대표적 주자로 역사의 시대를 연결하는 어쩜 빛나는 면류관의 주인이란 점이다.
이에 본인은 많은 지식을 습득한 역사가는 아니지만 우리 세인들의 상식으로 평창인 모두가 의식하고 공유하자는 의미에서 평창에 박물관 건립의 취지등에 관한 다수의 글을 쓴것처럼 이제 평창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박물관 건립으로 흩어져버린 평창의 모든 역사 사료들,,, 현지에 있어야 할 고인돌까지도 관리할 수 있는 향토사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로써 평창의 역사속에 담겨있는 문화를 자랑으로 삼아 의식과 긍지를 높여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평창인들의 자세를 다시한번 점검해본다면 영월과 정선은 엉터리 역사를 포장하여 전국의 답사 일번지를 만들었다.당시 평창의 케치프레이즈는 해피 700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추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바처럼 평창은 산과 강을 굽도는 곳의 퇴적평야들에 선사인도 생활하기 종은 택지를 마련하기에, 또한 해피 700의 따사로운 햇살이 감도는 청정 하늘도 가세하는 것이다.
여기서, 700고지가 신체 리듬에 쾌적할 할 수는 있어도 장수한다는 이야기는 위선이다 세계의 장수촌은 해발 150m이내이며 높은 고도에서도 장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런 설명은 적확하지 못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당시에도 나의 친구들은 계장 또래라.. 당신들은 군대로 말하면 말뚝하사관들이니 당신 집을 수선함에는 합당한 것으로 하라고 말한적이 있다.
그러면 해피 700에관해서 인간 수명과 쾌적한 기분등 생리적인 것만 집착하기엔 너무 고지식하였다, 시각을 넓혀서 해피 700의 청정 하늘에 요즘 레져의 첫번째 산업은 천문대이다. 고도의 위치에 맑은 하늘엔 별빛도 초롱하기에 천문대도최적지란 점으로 만약 평창에 천문대가 잇다면 영월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내방할 것이다.
물론 영월에 있지만 밤하늘 보는 초교생들에겐 그 수요가 모자라고 또한 영월의 천문대보다 평창의 청정하늘에 천문대는 그만큼 더 효과적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끝나고 평창의 콘도등에 손님을 부르는 여러 방법중 그 첫째가 천문대일것이다. 이렇게 해피 700도 생체적을 넘어서는 레져의 시각에서 바라봤어야 했다. 아니 지금도 늦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이렇게 평창은 동계 스포츠에서부터 밤하늘의 천문데까지 총체적 레져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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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 적석총이라는 역사의 오류에 문제풀이]
위의 역사서 <강원도의 선사문화>라는 도록에서는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라 불리는 돌무지를 모두 적석총(積石塚)이라 한다, 또한 평창문화원 발간의 지명지에서 여만이의 예담은 기록조차 없지만 응암리의 이담은 상세 설명하며 전투를 위해 돌을 모았다는등 여러가지 설 중에 적석총을 제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전투를 위해 돌을 모았다는 것은 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나 행주산성에서는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다 모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래서 행주산성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도원수 권율목사가 인근 부자들에게 도면을 주고 석차등을 만들어 줄것을 부탁하였던 바 해주 부자들이 제일많이 만들어 노비들이 등에 메고 짋어지고 행주산성으로 날리올때 부녀자들은 앞 치마인 행주치마에 담아서 일렬로 이동하는 모습에 행주라는 단어가 더 인상적이지 않켔냐는 박사논문이 더 확증적이다
만약, 문경새재에서 조정으로 올라오는 적들에세 전투를 대비하여 돌을 모아두었다면 이해하겠으나 강가에 누적단 두 곳에 돌을 모아 전투를 대비한다는데, 그럼 적은 사방 팔방으로 흩어져 지나간다면,,, 옛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어둡지는 않습니다.
다만 학자들의 이론에 구조적으로 뻐져드는 마치 매너리즘적 논리성이 현실을 무시했기에 이런 경우를 설명하는듯 합니다.
그러기에 응암리이나 여만리의 천변의 장강에 흔한 돌을 굳이 모아서 전투 대비를 할 필요가 상식에 위배된다.
또한 역사에서 모두 적석총이라 하지만 이 두 곳의 돌무지들은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대 신앙의 성립과 제반 이야기>
적석총의 고구려의 무덤양식입니다. 적석총은 고구려에서 시발되어 백제문화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백제초기 적석총은 송파의 삼전지하차도 위에 있다.
이 적석총은 초기 적석총으로 별로 크지 않은 돌로 3단을 쌓았는데 그리 높지않고 4각스퀘어 모양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 2km에 백제 초기 고분군이 있는데 그것의 양식은 신라 무덤군처럼 둥그렇게 쌓은 흙의 분묘로 이 고분들은 삼전동 적석총에서 멀지 않은 시간대에 이질적 문화양상을 드러낸다.
4각 묘에 대해서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지만 본인은 지구상의 4각 묘들은..,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 태왕비나 장군총,마야, 아즈택 문명의 신전이나 이집트 기자 피라밋, 그리고 서안의 미 발표분 피라밋 수백개...왜 이 묘들은 자연스럽게 둥근 모양이 아니고 4각 뿔의 피라밋 형태를 추구하는가 하는 점의 공통점에 상당한 의문을 가진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과 원형, 그리고 지역적 여건에 따르는 자연형등 몇개 않되는 도형에 4각형을 취하는 것은 어쩜 보편적 견해일지 모르나 미술과 문화의 특성중의 하나는 비쥬얼 싸인의 시각적 언어어이지만 이를 기억적으로 소화하여 일련의 시리즈 형태로 발전해 나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면, 인간의 발전역사는 이러한 계통적 추구에 의한것으로 이어져 오고있기 때문에 이 모든것이 하나의 문화권에서 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고구려 문화의 정체성에는 종묘, 사직과 더불어 동남방의 별자리로 보는 영성신앙(靈星)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엔 영성문화가 없는 중국것이라 하지만 고구려 문화엔 영성신앙의 영성제도 우리 문화의 저변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 연구총서 2005 p48 )
사직의 社와 稷 의 神은 물론 영성제는 일종의 농경의례로 농사의 전 과정을 모의 반복하는 의례로 어떤일을 흉내내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에 기초하여어떤 일을 흉내내는 주술로 가령 가뭄에 주술로서 마른땅에 물을 뿌리면 실제로 비가 내린다는 "모방주술"로 지금도 우리네 마음속에서도 이러한 동일한 생각까지의 저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고대국가에서는 종묘와 사직, 영성(靈星)숭배 사상은 어쩜 당연한 믿음이지만 이것은 대략 土神들이며 또한 여기에 이 모든 우주의 근간인 하늘의 神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북방 샤마니즘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로 우리나라에서는 잊혀져 가는 문화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을 보이게하는 깃발이기도 하며, 우리 마음의 평화의 염원을 펄럭이는 깃발에 실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중요한 영적 도구이다.
성황당(서낭당)의 서낭신은 민간신앙이라고 하는, 기복신앙(祈福信仰- ‘비는’ 문화)의 중심에서 오랜 세월 모셔져 온 것 같다.
서낭당은 성황당(城隍堂)과 같은 뜻이며 지역에 따라 천왕당이나 국사당등으로 불리는데,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콘모양의 돌무더기를 쌓은 누석단(累石壇)과 신성시되는 신수(神樹) 또는 장승으로 이루어 지는데 오색헝겊을 걸어놓은 서낭나무와 누석단으로 구성된다. 또한 서낭당은 당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누석단과 신수를 말하는 것이며 당집과 입석(立石)의 형태로도 구성된다.
마을에 하나씩은 서 있던, 당산(堂山)나무와 서낭당..오색 천을 걸어 바라에 날리던 모습, 마치 요즘 TV에서 보는 티벳 어느 산간마을처럼,,,서낭당의 서낭신앙은 마을수호라는 기능으로 서낭당은 지역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전쟁시 석전(石戰)에 대비하여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실제적인 기능보다는 마을수호,액운퇴치,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종교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호신으로서의 성황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성황은 국행(國行)성황과 민간에서의 성황으로 나누어 지는데 국행성황에는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옛 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마을 어귀에 서낭당에서 마을 수호와 전염병 예방의 기원등 祭儀의 고사를 지내고 빌며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의 문화는 우리 생활속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70년대 새마을 운동에 구 시대 유물로 사라진듯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엔 아직도 그에 대한 믿음의 신앙은 남아있다.
(의료 과학이 발달되기전 옛날엔 전염병은 중국이나 노르망디 에서 페스트란 전염병으로 수천만명씩 죽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나라엔 구한말 콜레라등이 끊이질 않았다 한다)
먼 길을 걸어갈때, 아니면 강가의 놀이에서도 돌을 쌓아놓고 무엇이든 잘 되라고 바라는 마음과, 그보다 좀 더 이해하자면 뒷뜰 장독대에 새벽에 기른 정화수를 올려놓고 두손모아 빌며 기원하는 마음은 기복신앙으로 서낭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네 사회는 오색천의 깃발과 누적단에 당집의 서낭당은 꺼려하면서도 진정 마음 한 구석엔 인간사의 심정을 하늘에 맞기는 신앙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여만리 예담의 소고>
평창의 여만리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으로막힌 퇴적지의 평야로 내왕의 입구는 꼭 강을 건너야 한다. 장마로 강물이 불땐 송개산 중턱을 타고 상리로 나올수도 있다. 본인은 이 길을 초교때부터 알고있었다. 그것은 장맛비가 오전내내 계속내리자 여만리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 가란다. 이미 배는 묶이고 늦기전에 송기산을 타고 집에가는 힘든 하교이지만 취미도 없는 과목을 수업하던 시간에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인은 여만리와 응암리를 자세히 쓸 수 있는것은 지금은 없지만 여만리엔 제일 친한 친구 두명이 살았고 응암리엔 지난 시절 천렵을 수 없이 다녀 동네에 또래의 남,녀는 모두 친구가 될 정도로 이 두곳은 논길까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 글을 쓰기에 참으로 다행이란 느낌마져 든다.
여만리를 들어가는 입구는 근자에는 교량이 있고 이전에는 배와 겨울철엔 섶다리로 왕래하였지만 그 옛날엔 자급자족 시대에 왕래가 그렇게 빈번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여만리를 통행하자면 시루목 개천의 징검다리가 가장 먼저이고 다음으로 여울 바로 위가 강물을 건너기에 가장 수월한 곳이다.
바로 이곳을 건너면 돌장광을 지나 밭터 사이에 약 1층반정도 높이의 돌 무더기가 그보다 좀 적은 무더기와 나란히 있었다(현 여만교를 건너서 오른쪽 여울 직전쯤) 역사에선 이를 적석총이라 하는데 총(塚)자는 무덤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설령 옛 조상들은 냇가에다 무덤을 쓸 일이야...아마 조상이 본새 청개구리였던 모양일까??
이 예담을 혹자들은 뙈담이라고도 하며 몽고군 항쟁정도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방어막 정도로 추정하던데,,,,뙈담은 아마도 예담의 강조되는 발음차이 정도일 것이고 위에서 설명대로 냇가에 石戰을 준비하는...몽고군 항쟁에 이런 돌 무더기를 쌓아서 뭘할까 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여만리 강을 건너서 들어서는 입구에 위의 설명대로 돌무더기 두개의 서낭단의 누적단이 쌓여 있다. 그 규모는 큰 누적단은 현 제방 높이쯤으로 전국 어디에도 이리 큰 누적단은 없슬듯 하다.
이 돌들은 강 부변의 큰 호박돌로 모두들 산화철 성분이 흘러나오고 씻기지 않아 검게되에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중요한것은 주진쪽의 위의 무더기가 더 높았으며 이러한 구(丘)을 만듬에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모구(旄丘)라 하는데, 이러한 서낭당이 정형이며 이로서 태백산의 민족정기를 잇는 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4자성어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뜻은 여우가 구릉을 향해 머리를 향한다는 의미이지만 어쩜 언덕을 향하는 바램은 인간의 이상인듯, 과거 고구려에서부터 우리의 역사에 임금도 장수도 모두 깃발로 상징하지만 서낭당의 모구에 꼽히는 깃발은 인간이 높은 하늘을 향해 제를 드리는 것이다.
( 이 서낭당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규모고 또한 두개의 누적단으로 정형이란 점인데. 제방돌로 사용할때 이러한 역사의 의미는 모르고 그 전경사진이나 실측의 기록도 남지 않고 그 동네 친구들도 사진기가 귀한 시간대라 사진 한장 없다.
아마 조선시대에는 이 누적단 서낭단 위에 적색과 백색 아니면 오색의 깃발이 나부끼었슬 것이다. 이것으로 요즘 시각에선 무당의 굿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이 앞을 지나갈땐 큰 소리도 잡담도 금했슬만큼 신성한 장소로 마을의 상징적 존재였다.
지금으로선 어디 어디 서낭당이 대표적이라 하지만 예전엔 여만리 서낭당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뿔모양의 돌무더기 두개는 적석총이 아니라 서낭당이다.
돌 누적단이 서낭당이란 입증적 요소를 하나 더 첨부하면 그 옆엔 당집이 있었는데 1972년도인가 종부다리도 내려앉는 홍수에 서낭당의 당집은 유실되었고 새마을 운동시기라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여기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내던 아름다운 모습의 문화는 단절되고 돌 무더기의 서낭당도 그 역사이야기는 잃어버린 것이다.
혹시나 이 점에 관하여 내용을 알고 계신 분들은 수고스럽지만 멘트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이 문화도 잃어버린 평창의 위대한 역사이고 서낭당의 의미도 모르면서 겉으로 서구식과 종교에서 볼때 가치없는 무속으로 폄하하지만 기실 오늘도 우리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전통문화이기에 역사 문화위원님들은 이에 고증도 있어야 좋다는 생각입니다.
<응암리 이담에 대한 소고>
위 사진에서 응암리 적석총은 BC 200~AD라 표시하는데..
당시에는 산에다 묘를 쓰는 것이 아니라 평지에다 쓰곤 하였다(삼전동 적석총, 각 고분들,,), 하지만 응암리 이담이라 불리는 돌담식의 무더기는 적석총 형태를 끼고 있지만 한 시기에 이루어진것이 아닌듯 하며, 또한 이상한것은 적석총 특성상 평지에서 만들어야 하지만 여만리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은 모두 강가장자리 천변의 지역에 있는데 이들은 큰 장마가 지면 수몰지역이 된다.
이곳에 적석총이라는 무덤을 썼다면 고대인들은 마치 청개구리가 냇가에 어미묘를 쓰고 걱정하는 愚人(어리석은)들이었단 말인가?? 이건 史家들의 악질스런 모습일뿐,,,
응암리는 전체 가구가 대략 25가구이다. 한때 평창군 인구가 10만일때나 지금 4만일때나 응암지역의 인구수는 영향을 받지 않는듯 하며 그렇다고 더 많은 가구가 늘어날 공간도 없는 실정이라면 이 적석총의 주인은 어떤 촌장이었슬까??
이 돌 무더기를 헐어서 제방에 사용할때 각기 다른 층에서 토기등이 출토되었다는데, 그러면 주거 공간이었슬까?? 알 수없지만 또 하나의 추정으로 땅 속엔 고려장터가 있지 않았슬까??
하지만 우리역사에 어떤 이상한 사가들의 말이 고려장이다.
땅을 파고 그 속에 늙고 병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먹을 것을 조금 넣어 이후 굶어 죽는 고려장..우리 역사에 이런 쌍넘의 문화는 없었다. 만약 이런 문화가 있었다면 부모님을 공경하는 문화가 없었어야 할 것이고 그런 풍습이 전래되었슬 것이다.
정말 이것도 또한 사가들의 악질적인 모습일뿐이다. 아마도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어거지 사관의 영향이 아닐까 추정하며 모든 역사책에서 이 부분의 재고는 있어야 한다.
또한 응암리 적석총은 바로 아래가 장마만 지면 입수지역인데..청개구리 무덤을 본땄는가?? 산을 넘어 응암리에 도착하는 낮은 구릉지도 많은데 왜 강 가장자리에 있어야 할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만약 다른 용도라면 무엇이었슬까??
본인으로선 이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역사는 여기서 끝난것이 아니기에 지금으로선 혹시나 고증이 있으면 더한 아름다운 문화라 생각합니다.
이로서 잃어버린 평창의 문화와 유적 두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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