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평창인들은 내 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묻어버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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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느티나무 작성일17-04-25 19:08 조회3,183회 댓글0건본문
먼저 고향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관심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평소 김구 선생께서도 문화국가를 주창하셨습니다.
후세백작님의 글을 통해서 평창지방사에 대한 각별하신 애정에 존경심이 듭니다.
우리가 나고 자란 공간에서 동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큰 인연입니다.
연구는 실현되어 공유하고 창의성이란 생명을 불어 넣을 때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이 현실화되도록 같이 만들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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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창인들은 내 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묻어버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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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백작 2017.04.17 00:
> 화순의 김삿갓 종명지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
> 아마 한문으로는 사전에 아직 명사가 없고 終命地 라고 써야 맞겠지요??
> (화순은 김삿갓이 인생역정의 마지막 숨을 거둔 고장으로서 몇 억의 예산을 들여 김삿갓 동상등 세우고 추모 사업을 시작하였다)
>
> 전국은 지금 조금의 역사적 사료와 물증만 있으면 테마공원화하여 관광사업을 시작한다.
> 그 대표적 예를 보면 영월은 옛날에는 석탄의 산지로서 경제가 넉넉하였으나 80년대 이후 석탄산업의 퇴조로 경제는 낙후되어갔다. 그러나 80년대초 동강의 보존과 김삿갓 유적지의 자원화를 출발로 일전 글에서 소개처럼 무려 30여개의 박물관이 건립되어 어린 학생들에게는 교육과 여러 학습의 장으로 전국에서 가장 선호되는 학습관광지로 연휴때는 수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다 한다.
>
> 이에 비하면 평창은 여러가지 역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겠으나 김삿갓에 관한 내용의 연관은 없는 것일까??
> 그의 유적이 널려있는 곳마다 관광사업으로 인용하면서 그의 고뇌스런 삶의 일상을 알리면서 볼거리도 제공한다.
>
> 바로 전 글에서 김삿갓의 후손들은 선친으로서 그의 행로의 명확한 답을 알고있겠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평창 천동리는 김삿갓의 첫째는 양자를 보내고 대를 잇는 둘째 아들 익균이 살던곳으로 두 아들도 자란 곳이다.
>
> 천동리의 익균의 묘는 90년대에 후손들에 의해 이장되어 갔지만 김삿갓의 시비가 있다한다.
> 그렇다면 이 시비는 요즘 관광사업을 하기 오래전의 일로 그엔 무슨 사연이 담겨있슬까?? 이 내용도 참으로 중요한 한 점일텐데...
>
> 일전 김삿갓의 일대기에 참으로 이해하기 곤혹스런 이야기를 그린적이 있는데당시 김삿갓의 집안은 대역죄인으로 당 시대엔 양반들의 린치가 성행하여 좁다란 산간으로 피신하여 살았던게 현 영월의 김삿갓 생가일테고 아마도 여기서도 여의치 못하게되자 김삿갓의 아들 익균은 평창 천동리의 산협속으로 이사하였던 모양이다.
>
> 그리고 천동에서 거주시 김삿갓의 사후 3년만에 시신을 모셔오게 되는데 이때 와석리 생가를 들어가는 입구에 묘를 쓴다는게 숨어살면서 노출을 시키는 점의 이율배반적 행동일텐데...그리고 아마도 3년후에 시신을 모시게 된 사연은 천동으로 이주하여 숨어살면서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일듯도 하며, 또한 후손들이 천동으로 이사한 후에 타계하였슬 가능성이 큰데... 그의 아들은 화순서 시신을 옛날 생가 입구에 모셔다
> 놓은 점도 우리네 상식적 생각엔 어패가 있는 점이다.
>
> 여기서 물론 이 문제에 후손분들은 이 모든 역사를 정확히 알고 계실것이기에 세인들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나의 이러한 글은 역사의 서술에 이해하기 곤혹스러운 점의 기술인 것이다.
> 그러기에 천동리의 김삿갓 시비는 아마도 익균의 이러한 효자적인 일에 감동한 지역 주민들이 당시로선 조그만 詩碑 한점이라도 세워 주었든가 아니면 김삿갓의 묘도 혹시 천동으로 이장하였슬 추정에 기인했든 하여간 어떠한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
> 이 점에 세대는 지났어도 향토사학자들의 과제로 탐문적 이야기도 참 중요하리라.
> 평창의 응암리의 김삿갓 詩碑는 요즘 레져산업이 아닌 마을주민들의 진솔한 마음에 의해 세워진 시비로 스토리가 어떤 이야기이든 김삿갓 사후에 일어난 일로서 영월과 화순의 스토리보다 더 생동감있슬 것이고 김삿갓 사후의 역사에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
> 이 시비에 관한 역사이야기의 수집은 평창문화원 향토사학 전문위원님들이나 평창 향토사학회 사학자 회원님들의 몫인데... 최소한 이 부분의 향토사학에서 어떠한 리포트는 작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
> ----------------------------------------------------------------------------------------
>
> 물론 더 나아가 평창 향토사학의 과제는 여러 현안들이 있다고 봅니다.
> 그 중에 평창 아리랑입니다.
> 평창아리랑은 가락의 노래이기 전에 평창인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
> 이 아라리는 테백산맥 영서 산간지방의 메나리조 아리랑으로 평창, 영월, 정선의 공간적 동일과 시간적 동일성에서 자생하여 불리워지던 특유의 음색의 아리랑이었다.
>
> 이 아리랑에서 정선은 구한말 뗏목경기로 메나리조 산의 기능을 상실하며 이제는 깡자의 거짓말 논리의 아라리로 독선을 뿜고있는데..그 중 첫째가 만수산이란 가사에 600년전에 시원이라 하며 오대산에 침거한 이색이 전오륜의 집안으로 정선아라리의 원류라한다(김연갑 주장),
>
> 이 가사는 청옥산 육백마지기에서 봄나물 뜯을때 부르는 발상의 가사란 점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저의 충분한 반론의 글이 있습니다.
> 또한 정선 교육청 학습지도 자료엔 홍교장이란 선생이 아리랑의 원조는 정선이고 여기서 부산으로.. 또 한 코스는 평창을 지나 서울로,,이렇게 전세게로 퍼져 나갔다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김일성식같은 주입식 교육을 했었다.
>
> 그것이 오류인줄 알면서도 계속 자행하고 있는데 교육직의 어느 친구왈 아라랑은 정선에서부터 출발햇다고 말하길래 역시 교육직 게통은 쇠뇌당하였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
> 아리랑의 보고는 한치뒷산 청옥산의 아라리인데,정선왈 한치는 정선한치라 주장한다...
> 여기엔 평창의 역사학자 한 분의 증언으로 미탄의 한치와 정성의한치는 한문으로도 틀리다고 한다. 아니 그보다 미탄의
> 청옥산의 청옥채들, 곤드레딱죽이는 지천으로 춘궁기에 봄나물 캐지만 정선의 한치는 폐광이 있으며 나물 한포기 나지 않는다 한다.
>
> 또한 언젠가 평창의 향토사학을 하시는 분들이 평창아리랑의 근원을 파악코져 미탄을 넘어 광한리까지 답사하였다는데 마치 에에 반격이라도 하듯이 근자엔 성마령에다 정선 아라리의 시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정선에서 미탄으로 아리랑이 전래되었다는 아베가 독도 물어뜯는식의 詩碑이다.
>
> 이래도 평창인들은 반격의 평창아라리의 재 이론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론은 어려운게 없으며 영서지방에서 가장 먼저 채집된 진부의 "왕자 축자로 다 나아간다"라는 가사에 대해서도 본인은 이미 정확한 해석을 하고있다.
> 물론 평창아리리의 제 이론 확립을 하기엔 정선 아라리가 도용하는 평창아라리 가사들에 대해서 그들의 제 논리 부족이란 점을 타파하여야 한다. 이미 그점도 확연하게 구분해 놓았다.
>
> 언제라도 정선 아라리의 이론가들도아닌 이론자들의 본인 후세백작의 글에 논쟁은을 가한다면 언제든지 기꺼히 답을 하리라. 하지만 정선 아리랑은 방대한 시스템을 구축하였기에 본인 혼자서 타파하기엔 역 부족이다.
> 평창도 여럿이 스크럼을 짜고 앞으로 평창아라리의 제 이론 확립도 향토사학자들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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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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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평의 메밀꽃 필무렵은 이효석을 테마로 하고있고 연간 메출도 기백억의 신바람나는 축제임에는 틀림없다.
> 그러나 그의 출생지에서부터 성장과정의 역사는 억지다.
> 이 점은 간과한다 하여도 가산 이효석 선생은 나의 모교 평창초등학교 출신이다.
>
> 가산 이효석 선생은 시대를 넘어서는 지성으로 우리 국문학사에 우뚝선 모습은 모교의 자랑이고 긍지이다.
> 우리 후학들은 가산 선배님을 기리기 위해서 최소한 모교에서는 가산 백일장이라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
> 전국에 학생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백일장을 하기 위해서는 시상에 잿기장 상품주는것으로 그치지 말고 1~20명 단위로 뽑아 문학기행을 시켜주는 방안등으로 유능한 인제들을 불러들여야 함이 백일장의 격을 높여 줄 수 있는 것이다.
> 선배님의 명예에 걸맞는 전국 최고의 백일장으로 거듭나는 노력또한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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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가을 평창읍 하리에서 발굴조사 완료된 한반도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300년)의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함께 나왔다. 나란히 출토되기는 처음이다.
> 여기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의 시대순으로만 보아도 2,500여년전의 古인골로 그 시기의 오차값은 별로 없는듯 하며,이 "하리 청동기 유적"을 학게는 어떠한 입장에서 볼 수 있슬까??
>
> 물론 아직은 고조선과 그 위의 예, 맥족의 남하의 역사가 아직 뚜렸한 정설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에 학계에서는 이"하리 청동기 유적"을 고조선이라 부르지 못하고 있지만,,,고조선은 국가를 말함이며 고조선의 태동 이전에 북쪽에서 예와 맥족이 남하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다는 설이 지금으로선 가장 유력하다.
>
> 춘천지방 일대를 "맥"국이라 부르며 강릉지역은 "예"라 지칭하며 평창일대엔 태기왕의 역사가 전해져 내려오지만,,,에와 맥은 원래는 국가가 아닌 민족의 이름이며 고조선 말기에도 고조선 주변에 예<맥국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강한 국가로 형성되는 고조선의 영향아래 놓이므로 본인은 이 역사의 "하리 청동기 유적"의 古인골을 고조선인이라 표현하였다.
>
>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의 논쟁을 들춰본다면 아마 두달전쯤 서울대 명예교수인 신용하 역사학자께서는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에서 북방에서 남하하였다는 기존학설에 반하여 “한민족은 유라시아 대륙의 어느 동토지역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민족이 아니라며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돼 유라시아로 진출한 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
>
> 신 교수는 약 5만년 전 찾아온 빙하기에 주목하여, 당시 지구가 얼어붙으면서 북위 40도 이북은 인류가 살수 없는 척박한 땅이 되었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남진했다. 이때 북위 40도 이하의 동굴에 들어간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석회암 동굴이 가장 많은 한반도에는 많은 인구가 밀집하게 됐다.
>
> 한반도에 인구가 밀집하자 ‘식량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식량난에 시달리던 한반도의 인류는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이주를 시작했다. 신 교수는 중국 랴오허 서쪽 지방에 정착한 민족을 "맥족". 랴오허 동쪽부터 연해주에 터를 잡은 민족을"예족" 한반도에 남은 민족을 "한족"이라고 주장한다.
>
> 약 5000년 전에는 한족과 맥족, 예족이 다시 뭉쳐 고조선을 건국하고 한국민족이 탄생했다. 세 부족은 혼인을 통해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됐다. 신 교수는 이를 가리켜 ‘언어, 지역, 문화를 매개로 결합한 인간 공동체’라고 소개하며 “한국민족의 자생적 형성에는 고한반도에서 생활한 초기 신석기인이라는 뿌리 깊은 배경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
> 여기에 반론으로 유니스트 게놈연구소는 국제공동 조사단을 구성해 현 러시아 동쪽의 고구려와 동부여, 옥저의 영토에 있는 "악마의 문"동굴에서 발견된 7,700년전의 인골의 유전자(게놈)을 분석하여 갈색눈과 삽모양의 앞니등 한국인의 특성을 확인하여서 한반도 고대인은 악마의 동굴의 인골과 같은 게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것은 북방계와 남방계 아시아인이 뒤 섞아면서 한반도인의 조상이 형성하였다는 주장이다.
> 지금 고조선 국가의 정체를 밝히기에 기존 학설에 반하는 열띤 논쟁이 한창이다.
>
> 여기서 고구려 옥저의 국가는 기원후인 AD시기 이후이며 7,700년전의 인골이라면 이 국가들로부터 5,500년전의 인골인데.예족과 맥족이 남하 이전의 시기에 어찌 고구려, 옥저의 고대인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
> "악마의 동굴"에서 출토된 인골과 북한에서 7,000년된 고 무덤의 인골의 표본을 채집할 수만 있다면 이 두 인골의 게놈 (염기서열이 같아야 할 것이다.
> 이 인골이 북한지역이라 제한된다면 평창 하리유적의 청동기 시대인의 게놈과 악마의 문" 동굴의 인골과는 같은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 명확한 청동기 시대나 고조선 시대의 인골을 하리 청동기 유적에 단 한사람만 발굴되었기에 지금 언 고인골 학회에서 아마 게놈분석중일텐데... 정말 북방 스키타이와 남방문화의 짬뽕이었을까 그에 명확한 실체적 해답은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의 古인골이 그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
> 이만큼 그 가치가 중요한 하리 청동기 유적에 평창인들은 박물관 짓자는 이야기 한 번 없이 古인골은 유람중인것이다
> 물론 고인골 자료정리엔 약 2년이 소요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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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운동회때 손뼉치던 3, 3, 7 박수 아십니까??
> 해가 떠도 평창,
> 해가져도 평창,
> 평창이 최고야~~
>
> 평창인들은 이 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묻어버린다면
> 언제 이러한 응원의 멧세지를 보낼 수 있슬끼??
>
>
평소 김구 선생께서도 문화국가를 주창하셨습니다.
후세백작님의 글을 통해서 평창지방사에 대한 각별하신 애정에 존경심이 듭니다.
우리가 나고 자란 공간에서 동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큰 인연입니다.
연구는 실현되어 공유하고 창의성이란 생명을 불어 넣을 때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이 현실화되도록 같이 만들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
>
> [ 평창인들은 내 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묻어버릴 것인가?? ]
>
> 후세백작 2017.04.17 00:
> 화순의 김삿갓 종명지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
> 아마 한문으로는 사전에 아직 명사가 없고 終命地 라고 써야 맞겠지요??
> (화순은 김삿갓이 인생역정의 마지막 숨을 거둔 고장으로서 몇 억의 예산을 들여 김삿갓 동상등 세우고 추모 사업을 시작하였다)
>
> 전국은 지금 조금의 역사적 사료와 물증만 있으면 테마공원화하여 관광사업을 시작한다.
> 그 대표적 예를 보면 영월은 옛날에는 석탄의 산지로서 경제가 넉넉하였으나 80년대 이후 석탄산업의 퇴조로 경제는 낙후되어갔다. 그러나 80년대초 동강의 보존과 김삿갓 유적지의 자원화를 출발로 일전 글에서 소개처럼 무려 30여개의 박물관이 건립되어 어린 학생들에게는 교육과 여러 학습의 장으로 전국에서 가장 선호되는 학습관광지로 연휴때는 수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다 한다.
>
> 이에 비하면 평창은 여러가지 역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겠으나 김삿갓에 관한 내용의 연관은 없는 것일까??
> 그의 유적이 널려있는 곳마다 관광사업으로 인용하면서 그의 고뇌스런 삶의 일상을 알리면서 볼거리도 제공한다.
>
> 바로 전 글에서 김삿갓의 후손들은 선친으로서 그의 행로의 명확한 답을 알고있겠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평창 천동리는 김삿갓의 첫째는 양자를 보내고 대를 잇는 둘째 아들 익균이 살던곳으로 두 아들도 자란 곳이다.
>
> 천동리의 익균의 묘는 90년대에 후손들에 의해 이장되어 갔지만 김삿갓의 시비가 있다한다.
> 그렇다면 이 시비는 요즘 관광사업을 하기 오래전의 일로 그엔 무슨 사연이 담겨있슬까?? 이 내용도 참으로 중요한 한 점일텐데...
>
> 일전 김삿갓의 일대기에 참으로 이해하기 곤혹스런 이야기를 그린적이 있는데당시 김삿갓의 집안은 대역죄인으로 당 시대엔 양반들의 린치가 성행하여 좁다란 산간으로 피신하여 살았던게 현 영월의 김삿갓 생가일테고 아마도 여기서도 여의치 못하게되자 김삿갓의 아들 익균은 평창 천동리의 산협속으로 이사하였던 모양이다.
>
> 그리고 천동에서 거주시 김삿갓의 사후 3년만에 시신을 모셔오게 되는데 이때 와석리 생가를 들어가는 입구에 묘를 쓴다는게 숨어살면서 노출을 시키는 점의 이율배반적 행동일텐데...그리고 아마도 3년후에 시신을 모시게 된 사연은 천동으로 이주하여 숨어살면서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일듯도 하며, 또한 후손들이 천동으로 이사한 후에 타계하였슬 가능성이 큰데... 그의 아들은 화순서 시신을 옛날 생가 입구에 모셔다
> 놓은 점도 우리네 상식적 생각엔 어패가 있는 점이다.
>
> 여기서 물론 이 문제에 후손분들은 이 모든 역사를 정확히 알고 계실것이기에 세인들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나의 이러한 글은 역사의 서술에 이해하기 곤혹스러운 점의 기술인 것이다.
> 그러기에 천동리의 김삿갓 시비는 아마도 익균의 이러한 효자적인 일에 감동한 지역 주민들이 당시로선 조그만 詩碑 한점이라도 세워 주었든가 아니면 김삿갓의 묘도 혹시 천동으로 이장하였슬 추정에 기인했든 하여간 어떠한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
> 이 점에 세대는 지났어도 향토사학자들의 과제로 탐문적 이야기도 참 중요하리라.
> 평창의 응암리의 김삿갓 詩碑는 요즘 레져산업이 아닌 마을주민들의 진솔한 마음에 의해 세워진 시비로 스토리가 어떤 이야기이든 김삿갓 사후에 일어난 일로서 영월과 화순의 스토리보다 더 생동감있슬 것이고 김삿갓 사후의 역사에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
> 이 시비에 관한 역사이야기의 수집은 평창문화원 향토사학 전문위원님들이나 평창 향토사학회 사학자 회원님들의 몫인데... 최소한 이 부분의 향토사학에서 어떠한 리포트는 작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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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더 나아가 평창 향토사학의 과제는 여러 현안들이 있다고 봅니다.
> 그 중에 평창 아리랑입니다.
> 평창아리랑은 가락의 노래이기 전에 평창인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
> 이 아라리는 테백산맥 영서 산간지방의 메나리조 아리랑으로 평창, 영월, 정선의 공간적 동일과 시간적 동일성에서 자생하여 불리워지던 특유의 음색의 아리랑이었다.
>
> 이 아리랑에서 정선은 구한말 뗏목경기로 메나리조 산의 기능을 상실하며 이제는 깡자의 거짓말 논리의 아라리로 독선을 뿜고있는데..그 중 첫째가 만수산이란 가사에 600년전에 시원이라 하며 오대산에 침거한 이색이 전오륜의 집안으로 정선아라리의 원류라한다(김연갑 주장),
>
> 이 가사는 청옥산 육백마지기에서 봄나물 뜯을때 부르는 발상의 가사란 점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저의 충분한 반론의 글이 있습니다.
> 또한 정선 교육청 학습지도 자료엔 홍교장이란 선생이 아리랑의 원조는 정선이고 여기서 부산으로.. 또 한 코스는 평창을 지나 서울로,,이렇게 전세게로 퍼져 나갔다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김일성식같은 주입식 교육을 했었다.
>
> 그것이 오류인줄 알면서도 계속 자행하고 있는데 교육직의 어느 친구왈 아라랑은 정선에서부터 출발햇다고 말하길래 역시 교육직 게통은 쇠뇌당하였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
> 아리랑의 보고는 한치뒷산 청옥산의 아라리인데,정선왈 한치는 정선한치라 주장한다...
> 여기엔 평창의 역사학자 한 분의 증언으로 미탄의 한치와 정성의한치는 한문으로도 틀리다고 한다. 아니 그보다 미탄의
> 청옥산의 청옥채들, 곤드레딱죽이는 지천으로 춘궁기에 봄나물 캐지만 정선의 한치는 폐광이 있으며 나물 한포기 나지 않는다 한다.
>
> 또한 언젠가 평창의 향토사학을 하시는 분들이 평창아리랑의 근원을 파악코져 미탄을 넘어 광한리까지 답사하였다는데 마치 에에 반격이라도 하듯이 근자엔 성마령에다 정선 아라리의 시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정선에서 미탄으로 아리랑이 전래되었다는 아베가 독도 물어뜯는식의 詩碑이다.
>
> 이래도 평창인들은 반격의 평창아라리의 재 이론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론은 어려운게 없으며 영서지방에서 가장 먼저 채집된 진부의 "왕자 축자로 다 나아간다"라는 가사에 대해서도 본인은 이미 정확한 해석을 하고있다.
> 물론 평창아리리의 제 이론 확립을 하기엔 정선 아라리가 도용하는 평창아라리 가사들에 대해서 그들의 제 논리 부족이란 점을 타파하여야 한다. 이미 그점도 확연하게 구분해 놓았다.
>
> 언제라도 정선 아라리의 이론가들도아닌 이론자들의 본인 후세백작의 글에 논쟁은을 가한다면 언제든지 기꺼히 답을 하리라. 하지만 정선 아리랑은 방대한 시스템을 구축하였기에 본인 혼자서 타파하기엔 역 부족이다.
> 평창도 여럿이 스크럼을 짜고 앞으로 평창아라리의 제 이론 확립도 향토사학자들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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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평의 메밀꽃 필무렵은 이효석을 테마로 하고있고 연간 메출도 기백억의 신바람나는 축제임에는 틀림없다.
> 그러나 그의 출생지에서부터 성장과정의 역사는 억지다.
> 이 점은 간과한다 하여도 가산 이효석 선생은 나의 모교 평창초등학교 출신이다.
>
> 가산 이효석 선생은 시대를 넘어서는 지성으로 우리 국문학사에 우뚝선 모습은 모교의 자랑이고 긍지이다.
> 우리 후학들은 가산 선배님을 기리기 위해서 최소한 모교에서는 가산 백일장이라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
> 전국에 학생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백일장을 하기 위해서는 시상에 잿기장 상품주는것으로 그치지 말고 1~20명 단위로 뽑아 문학기행을 시켜주는 방안등으로 유능한 인제들을 불러들여야 함이 백일장의 격을 높여 줄 수 있는 것이다.
> 선배님의 명예에 걸맞는 전국 최고의 백일장으로 거듭나는 노력또한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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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가을 평창읍 하리에서 발굴조사 완료된 한반도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300년)의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함께 나왔다. 나란히 출토되기는 처음이다.
> 여기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의 시대순으로만 보아도 2,500여년전의 古인골로 그 시기의 오차값은 별로 없는듯 하며,이 "하리 청동기 유적"을 학게는 어떠한 입장에서 볼 수 있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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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아직은 고조선과 그 위의 예, 맥족의 남하의 역사가 아직 뚜렸한 정설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에 학계에서는 이"하리 청동기 유적"을 고조선이라 부르지 못하고 있지만,,,고조선은 국가를 말함이며 고조선의 태동 이전에 북쪽에서 예와 맥족이 남하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다는 설이 지금으로선 가장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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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지방 일대를 "맥"국이라 부르며 강릉지역은 "예"라 지칭하며 평창일대엔 태기왕의 역사가 전해져 내려오지만,,,에와 맥은 원래는 국가가 아닌 민족의 이름이며 고조선 말기에도 고조선 주변에 예<맥국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강한 국가로 형성되는 고조선의 영향아래 놓이므로 본인은 이 역사의 "하리 청동기 유적"의 古인골을 고조선인이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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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의 논쟁을 들춰본다면 아마 두달전쯤 서울대 명예교수인 신용하 역사학자께서는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에서 북방에서 남하하였다는 기존학설에 반하여 “한민족은 유라시아 대륙의 어느 동토지역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민족이 아니라며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돼 유라시아로 진출한 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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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교수는 약 5만년 전 찾아온 빙하기에 주목하여, 당시 지구가 얼어붙으면서 북위 40도 이북은 인류가 살수 없는 척박한 땅이 되었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남진했다. 이때 북위 40도 이하의 동굴에 들어간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석회암 동굴이 가장 많은 한반도에는 많은 인구가 밀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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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 인구가 밀집하자 ‘식량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식량난에 시달리던 한반도의 인류는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이주를 시작했다. 신 교수는 중국 랴오허 서쪽 지방에 정착한 민족을 "맥족". 랴오허 동쪽부터 연해주에 터를 잡은 민족을"예족" 한반도에 남은 민족을 "한족"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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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5000년 전에는 한족과 맥족, 예족이 다시 뭉쳐 고조선을 건국하고 한국민족이 탄생했다. 세 부족은 혼인을 통해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됐다. 신 교수는 이를 가리켜 ‘언어, 지역, 문화를 매개로 결합한 인간 공동체’라고 소개하며 “한국민족의 자생적 형성에는 고한반도에서 생활한 초기 신석기인이라는 뿌리 깊은 배경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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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반론으로 유니스트 게놈연구소는 국제공동 조사단을 구성해 현 러시아 동쪽의 고구려와 동부여, 옥저의 영토에 있는 "악마의 문"동굴에서 발견된 7,700년전의 인골의 유전자(게놈)을 분석하여 갈색눈과 삽모양의 앞니등 한국인의 특성을 확인하여서 한반도 고대인은 악마의 동굴의 인골과 같은 게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것은 북방계와 남방계 아시아인이 뒤 섞아면서 한반도인의 조상이 형성하였다는 주장이다.
> 지금 고조선 국가의 정체를 밝히기에 기존 학설에 반하는 열띤 논쟁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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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고구려 옥저의 국가는 기원후인 AD시기 이후이며 7,700년전의 인골이라면 이 국가들로부터 5,500년전의 인골인데.예족과 맥족이 남하 이전의 시기에 어찌 고구려, 옥저의 고대인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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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의 동굴"에서 출토된 인골과 북한에서 7,000년된 고 무덤의 인골의 표본을 채집할 수만 있다면 이 두 인골의 게놈 (염기서열이 같아야 할 것이다.
> 이 인골이 북한지역이라 제한된다면 평창 하리유적의 청동기 시대인의 게놈과 악마의 문" 동굴의 인골과는 같은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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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확한 청동기 시대나 고조선 시대의 인골을 하리 청동기 유적에 단 한사람만 발굴되었기에 지금 언 고인골 학회에서 아마 게놈분석중일텐데... 정말 북방 스키타이와 남방문화의 짬뽕이었을까 그에 명확한 실체적 해답은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의 古인골이 그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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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큼 그 가치가 중요한 하리 청동기 유적에 평창인들은 박물관 짓자는 이야기 한 번 없이 古인골은 유람중인것이다
> 물론 고인골 자료정리엔 약 2년이 소요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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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운동회때 손뼉치던 3, 3, 7 박수 아십니까??
> 해가 떠도 평창,
> 해가져도 평창,
> 평창이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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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인들은 이 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묻어버린다면
> 언제 이러한 응원의 멧세지를 보낼 수 있슬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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